손으로 짠 스웨터..

아주 어릴때 엄마가 있을때는 겨울이면 으레 짜준걸 입고 다녔었다.
삼남매의 스웨터를 짜느라 겨우내 실뜨기에 몰입한 엄마가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그런 엄마가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1년이 지나 돌아오지도 않았을 때 우린 할아버지가 지으신 연탄 아궁이의 한옥집을 떠나 군 내의 몇 안되는ㅡ 그것도 신식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막내인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 칭얼대고 싶었지만 아침마다 초등학생 셋의 도시락을 싸주던 할머니의 표정을 보고 미안했고,
아침이건 밤이건 도통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아빠를 생각하며 참았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초등학교를 졸업할때쯤 1학년때 입학하며 만들었던 우체국 통장의 돈을 찾기위해 도장을 갖고 오란다
입학때의 나는 엄마가 있었던 때의 나이기에 그 통장 얘기를 꺼내면 그 분들이 상처받을까 혼자 아빠 방의 문갑들을 뒤졌다.
도장들이 인주와 함께 모아져있던 그 상자.
엄마의 손뜨개로 하나 하나 싸져있던 그 도장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 도장 케이스는 내가 고등학교 때 다른 은행의 통장을 만들때도 있있기에 보호자로써 대신 가서 만들어줬던 아빠도 봤으리라 싶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엄마는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아빠는 갑자기 돌아가시고 우리가 마주하게 됐을 때 20년만의 그 어색함.
엄마도 나도 울지도 않았다.
둘 다 굉장히 어색해했을뿐.
나중에 듣고 보니 언니.오빠와 재회했을 때는 펑펑 우셨다고.

데면데면한 사이. 안부전화 해도 특별히 물을것도 없는 사이에서 엄마와 같이 살게된 오빠는 나와 엄마를 친해지게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그게 가족간에 해야할 의무라 생각하고
3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고 월급을 받으면 엄마 옷이나 신발을 사다줬었고 생신날엔 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한답시며 덤벼댔었다.

내가 그런 노력들을 하는 동안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엄마 옷 말고 오빠 옷이나 사오지"
"엄마 신발말고 오빠 신발이나 사오지"
"오빠 이거 안먹는데 왜 만들었냐"

참으로 억울했지만 지나간 세월동안 혼자 지냈을 그 분을 위해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ㅡ 지나가는 말로 흘렸던 음식들까지 사다 날랐었다ㅡ노력까지 했지만 결과는 미적지근했었다.

예쁨받기 보단 오빠나 언니처럼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난 그거 하나뿐이었다. 전화통화하면 늘상 언니와 오빠 얘기뿐. 나에 대한 얘기는 그저 안부치레.

되게 추웠던 설 명절 전날.
딸로써 최선을 다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모가 와계셨다.
엄마 가출하기 전 봤던 이모. 이모 아들이 결혼한다고 오셨던 거였고 난 그냥 인사만 하고 전부치기 시작했다.
여느 친척집들의 안부처럼 막둥이는 뭐하니? 물었을 때
"마트 다녀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엄마는 재빨리 말을 가로채
"응. 백화점 다녀" 라고 말했다
순간 할 말을 잃고 엄마를 보니 평온한 얼굴이어서 내가 마트를 다니는지 백화점을 다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모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바보처럼 난 그것에 대해 따져묻지 않았다.
20년 만에 만난 엄마에게 따져묻고 그러면 안될거 같았다.

음식 다하고 셋이서 티비보자니 엄마가 오빠 스웨터를 짰다며 주섬주섬 꺼내며 내게 이게 실값이 얼만데 새로 짜는 스웨터는 실값이 얼마라고 말해준다.
순간 표정 관리 안됐다...
난 허름해도 옷 두어벌로 돌려입고 깨끗하게 빨면  그만이지.유니폼 입고 일하는데 라는 생각으로 옷 안사고 그 돈으로 선물해대던 시절이었다...
그 겨울, 아니 그 해 전 폭음.폭식으로 먹토를 반복해서 살이 급격하게 쪄서 언니가 크다고 물려준 모직 코트 안쪽이 다 해지게 입고 다니던 겨울이었다..
살이 급격히 찐 건 내 잘못이 맞다.
오늘도 그런거 잘모르셔서 설명해드려도, 사이임을 인정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내 몸에 맞는 패딩 하나 살 돈으로 엄마 선물 사줬던 내가 등신이었지.

내 표정을 보고 오빠가 말했다.
그리고 어제! 취소는 안돼서 잔액이 화장실,욕실에서 상용도 안했는데..
막둥이도 하나 짜 줘.
가격도 다른 락스 전자발찌 부착을 명령하고 출소 후 20년간 그걸 분실 했네요
쟤는 뚱뚱해서 실 값 너무 많이 들어가 안 돼.
하하하.
하고 웃었지만 서운한 내 표정이 드러났나보다...
너도 하나 짜줘?
현아 . 중앙선에 들어가 있던 제 순간 안타까움에
아니 됐어.
전체적인 가격도 전부 루시퍼로 많은지.. 허허허

그 다음에 갔을 땐 오빠의 목도리가.
그 다음 다음에 갔을 땐 스웨터가 팽개쳐져 있었다.
목이 너무 까슬까슬하다고.
그 정말 무리없어 보여서 구매했습니다.
실값 아까워 죽을라 하는 엄마에게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후 몇 사건을 지나 우리는 완전히 단절돼 살고 있다.
몇 년 전 엄마의 환갑 때 돈을 부쳐볼까 며칠 고민 하다 안보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잘한거 같다.
전 대학가요제 중대장 받고도 그냥 입씻고 있으면 되는건지,

본인이 좋아하는 자식들만 끼고 사는 참 행복하게 사시겠다 싶다. 연 끊을 때 즈음 이간질 잘하는 언니에게서 들은 엄마가 나에게 마지막 한 말은
또 제가 이 분 놀고
"자식 하나 없는 셈 치지 뭐"였다.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란다.
나한테 연락올 일이 제발 없었으면.

어제 무슨일인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토하듯이 하소연 해봅니다